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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축구

수원인 정대세를 추억하며

세 개의 조국을 가진 남자.

정대세의 인생을 다룬 책의 부제다. 이 말을 한 단어로 줄인게 경계인이란 표현이다. 자이니치(在日, ざいにち) 정대세는 일본, 한국, 북한의 경계에 서 있다. 스스로를 '재일'이라 규정하고 '재일'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하는 야심가. 눈물이 많은 사나이. 수원에 입단하기 전 정대세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다.

이제 경계인 정대세는 수원인이 되었다. 2년반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대세와 수원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라운드에선 승부욕으로, 경기가 끝난뒤엔 팬서비스로 무장했으니 팬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대세에겐 축구선수로 한층 성장한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멋진 골장면만으로 기억되던 그의 하이라이트엔 멋진 어시스트와 연계플레이가 추가되었다. 염대세(염기훈+정대세)라는 명콤비와 특유의 헤어스타일에서 나온 새우초밥이란 별명까지. 정말 유쾌했던 동행이었다. 이젠 떠난 선수가 되었지만 정대세가 준 강렬함은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나에겐 최고의 피사체였다. 수원삼성블루윙즈의 사진을 찍은지 3년째 되던 해에 정대세가 입단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팬들과 함께 호흡하는 그 모습을 찍으면서 시야가 넓어졌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진을 찍은 지 겨우 5년 밖에 안 됐지만, 그 5년 중 가장 멋있던 피사체였다. 팬에게 먼저 다가와 자기 사진 좀 많이 달라고 했던 유일한 선수였다.

정대세의 마지막 경기를 본 뒤 그동안의 추억들이 생각나 사진첩을 뒤적였다. 인상 깊은 장면이 참 많았지만, 그 중에 몇 장면만 골라서 추억해보려 한다. 글이 좀 길어지겠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정대세가 준 강렬함은 더 이상 줄일래야 줄일 수 없으니까.

#2013 팬즈데이에서 인사하는 정대세

'Ladies and Gentlemen 내가 바로 정대세입니다!' 첫 인사부터 강했다. 상투적이지 않았으니 처음부터 팬들의 환호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디제잉을 한다면?' 이란 질문에 '빅버드를 클럽으로 만들겠다' 고 대답하기도 했다. 실제로 빅버드에서 디제잉을 하진 않았지만, 대신 매 순간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열광적인 분위기를 많이 만들어내지 않았다 싶다. 정대세의 득점은 빅버드를 클럽 분위기로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힙합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서포터는 빈지노의 'Boogie on & on'의 멜로디로 그의 응원곡을 만들어 주었다. 경기장을 뜨겁게 해준 노래였다.



#2013 3월 전북 원정에서 서정진의 골을 축하해주는 정대세

이때의 정대세는 아직 적응중이었다. 독일 쾰른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으니 감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시즌 초엔 경미한 부상으로 잠시간 결장하기도 했다. 이 날 정대세는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전반전 동료 공격수가 다치면서 일찌감치 교체 투입되었다. 5년 동안 전주에서 승리가 없었던 수원은 2:1로 승리하며 전북 징크스를 날려버렸다.


#다큐스페셜에 나오기도 했다.

그즈음 촬영한 MBC 다큐멘터리에도 이 사진이 나왔다. 사진을 찍은 나 말곤 아무도 기억 못할 정도로 조그만하게. 정대세의 랩탑 바탕화면으로 나온 이 사진은 팀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는 모습이 참 예쁘다. 다큐에 나왔던 정대세의 수원 첫 골 장면은 아쉽게도 찍지 못했다. 다른 일정이 겹쳐 홈경기를 가지 못했는데 그 경기에서 골을 넣은 것이다. 가지 못해 너무 아쉬운 경기다.



#축구화 던지기와 유쾌한 세리머니 (하단 우측 사진=블루포토 최대용)

2013년 어린이날 홈경기. 결승골을 넣은 정대세는 어김없이 축구화를 던져줬다. 골대뒤를 가득 채운 홈팬들 앞에서의 포즈는 기본. 입단했던 시즌 정대세는 매 경기 축구화를 팬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러다가 생긴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축구화 인솔 좀 돌려주세요!

축구화 안에는 각 선수의 발 모양에 맞춰 제작된 특수 깔창(통칭 인솔)이 있는데, 제작 과정이 꽤나 까다롭다. 이미 인솔을 한번 잃어버려 다시 제작했는데 그 인솔을 또 같이 던져버렸다. 팬들에게 다시 와 인솔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한 쪽 밖에 찾지 못했다. 그 뒤로 축구화를 던져주는 모습은 한동안 못 본듯 하다. 대신 득점한 경기에선 매번 유니폼을 던져주면서 팬서비스에 충실했다.


#2014 전북 원정 패배 후 팬들에게 인사하는 정대세

경기에서 지면 정대세는 매번 같은 자세였다. 허리를 푹 숙이고 팬들에게 사과하는 모습. 아니, 이 정도면 사죄라고 해야할까?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경기를 이기고 골을 넣은, 기쁜 순간에만 팬서비스를 하는게 아니라 경기를 진 순간에도 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남자였다. 그렇다보니 경기에서 진 날은 매번 정대세의 모습을 찍게 되었다. 팬들에게 미안해하는 선수들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선수였으니까..


#수원 고별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뒤에도 정대세는 머리를 감싸쥐며 미안해했다.


#골 찬스가 무산되면 항상 이렇게 아쉬워 한다.

#몸을 풀며 경기를 지켜보는 정대세. 2014시즌엔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대세가 수원에서 가장 힘들었을 시간이었다. 외국인 공격수 로저와의 경쟁에서 밀려나며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다. 입단 첫해에 비해 풀타임을 뛴 횟수도 줄어들었다. 공격수로서의 자존심인 두 자리 수 득점에도 실패하면서 참 많이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어려움을 전화위복 삼은 덕분에 2015시즌엔 최고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특히 2015년 4월 서울과의 슈퍼매치에서 기록한 2골 2도움은 슈퍼매치 역사에 기록될만한 최고의 모습이었다. 결정적인 골찬스를 만들어주는 이타적인 플레이와 깔끔하게 슈팅을 때려넣는 스트라이커로서의 면모가 동시에 빛난, 정대세의 축구인생에 남을 최고의 경기였다.

#위풍당당 정대세. 슈퍼매치에서의 득점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 인상 깊다.

#2015시즌 울산과의 홈경기 후 눈물을 보인 정대세

정대세는 눈물이 많다. 정대세의 눈물이란 이름의 자서전이 있을 정도다. 일본 시미즈로의 이적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울산전, 승리를 이끈 2골을 기록한 정대세는 경기 후 잠시 눈물을 글썽였다. 어쩌면 홈팬들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정대세는 이후 3경기를 더 뛰고 이적하였는데, 마지막까지 팀의 승리와 골을 위해 뛰는 모습은 정말 정대세 다웠다는 생각이 든다.


#슈퍼매치에서 득점한 후 약속했던 석고대죄 세리머니를 펼치는 정대세

#팬들을 배경으로 한 정대세의 세리머니

이제 빅버드에서 정대세의 세리머니를 볼 수 없다는게 참 아쉽다. 하지만 3년6개월이란 장기계약을 맺고 시미즈로 떠났으니.. 적어도 2018년까지는 정대세의 세리머니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 기회가 된다면, 시즈오카로 정대세를 보러 갈 생각이다. 그의 플레이와 세리머니를 다시 한번 보고 싶으니..


#태세 주니어(태주)와 함께

홈 고별전이 끝난 후 정대세는 '수원은 나의 고향이 되었다' 고 했다. 경계인 정대세는 이제 수원인 정대세로 남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경계인으로 살아 가겠지만, 나는 정대세를 수원인이라 하고 싶다. 수원에 유쾌한 추억을 남겨주고 멋지게 떠난 스트라이커. 수원삼성의 넘버 14. 수원인 정대세를 보는게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홍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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